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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슈뢰딩거의 고양이, 밤을 내달린다 郭、シュレディンガーの猫、夜を駆ける |
夜を駆ける Yoru wo Kakeru 밤을 내달린다 |
ⅰ : 센(千)은 유곽에서
얼마 전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지난 2월 한국일어일문학회에서 발간한 일어일문학연구 제72집 수록된 논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에 나타난 유곽의 메타포』가 그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의 명작 반열에 오른, 그래서 못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에 관한 논문인데요.
치히로가 뜻밖의 시련에 맞닥뜨려 스스로의 역경을 헤쳐나가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소녀의 정신적 통과의례, 자연과 인간의 교감,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 등의 테마를 보여준 이 영화를 두고
이 눈문은 일본의 전통적 정신세계로의 회귀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데
'아부라야(油屋)'라는 공간 구조와 거기에 등장하는 '고라쿠(後楽)'와 '가이슌(回春)'이라는 단어,
'센(千)'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 목욕보시의 전통, 유나(湯女)의 모습 등을 거론하면서
일본 근세 유곽 문화의 코드로 이 영화를 조명하는 논문이라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 |
回春 · 千 · 湯婆婆 | 예를 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요 배경인 아부라야(油屋)의 공간 구조에서
근세 삼대 유곽 중의 하나였다는 에도(江戸)의 요시와라(吉原)의 공간 구조를 언급하는데요.
즉, 아부라야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강, 배, 거리의 상점 등은
요시와라의 해자, 초키부네(猪牙舟), 나카미세(仲見世)에 대응된다고 추측하구요.
치히로(千尋)에서 센(千)으로의 이름 바꿈도 이른바 '겐지나(源氏名)'의 전통에 따른 것인데
원래 궁녀의 이름을 일컫는 '겐지나'는 세월이 흐르자 게이샤(芸者)나 유녀의 명명법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가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아부라야의 주인 유바바(湯婆婆)가 치히로(千尋)에게 센(千)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일본의 근세 시대에 유곽의 고급 유녀에게 허용된 '겐지나'의 명명법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
그 외에도, 아부라야 현관 벽면에 쓰인 '가이슌(回春)'라는 글씨에 주목하고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다이콘노카미사마(大根の神様)'의 등장을 언급하며
아부라야의 유녀들이 상당히 육감적이고 때로는 관능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는 점,
화장술과 차림새는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유녀들인 시라뵤시(白拍子)의 모습이라는 등,
일본의 중세사와 고전문학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의미 또는 상징 코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을 장면들을 예시하면서
그것들이 사실은 유곽 문화를 암시적으로 차용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아부라야와 근세 유곽의 공통된 메타포를 '재생과 치유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
湯女 |
유홍준의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서문을 보면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고, 느낀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말이 나오는데, 가끔 그 말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요.
이 논문을 읽고난 다음에도 그랬습니다.
영화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상징 코드들을 저는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저 '좋다'라고만 느끼면서 영화를 봤을 뿐인데
어떤 이는 8세기의 고묘(光明)황후의 목욕 보시 설화에서 비롯된 일본 고전 문학의 테마까지 떠올렸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분야를 다 알 수 없고 또 특정 분야도 깊게 들어가면 그 분야의 전공자/전문가 외에는 모르는 게 당연하긴 합니다만···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을 읽으면서 '전체관람가'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것을 실감한 거죠.
● 이용미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에 나타난 유곽의 메타포』 결론, 열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기존의 평가 - 지구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 소녀의 자아 발견 및 정신적 성장기, 다양한 문화의 접목을 지향한 문화다원주의 등 - 와는 달리, 전통 문화로의 회귀 내지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먼저 영화의 주 무대인 아부라야(油屋)의 공간적 배경과 등장 인물 조형이 근세 유곽의 그것을 차용한 것임을 밝히고 각각의 상징코드를 살펴보았다. 아부라야(油屋)를 둘러싼 강과 배, 그리고 내부의 붉은 색조는 근세 유곽의 공간 구조와 유사성을 지닌다. 또한 고라쿠(後楽), 가이슌(回春) 등의 용어 역시 유곽 문화의 코드로 해석 가능하다. 치히로의 또 다른 이름인 센의 명명법은 겐지나(源氏名)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영화 속 유나(湯女)들의 역할과 외형도 시라뵤시(白拍子)와 유나(湯女) 등, 전근대 유녀를 모델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영화의 배경 내지 음화로서 유곽 문화를 차용한 이유, 다시 말하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유곽의 공통된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부라야(油屋)와 근세 유곽은 재생과 치유, 그리고 신과 소통하는 성(聖)스러운 유토피아라는 상징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용미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에 나타난 유곽의 메타포』 중에서. |
『千と千尋の神隠し』に
おける郭のメタファー |
ⅱ : 고양이 · 망치 · 약병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엔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실감했던,
또는 '각자의 관심에 따라 눈여겨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또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츠츠이 야스타카(筒井康隆)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을 영화화한,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를 CGV상암에서 보고 나오던 길이었는데요.
함께 봤던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들」중 하나가 이렇게 물어보더군요.
"잠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긴 했는데 고양이·망치·약병이 담긴 상자가 나오는 장면이 생각나냐"고.
영화 후반부, 여자 주인공이 '타임 리프'의 비밀을 알게 되는 장면 중에 스틸 컷으로 나온댔는데
하필이면 저는 물론 그날 함께 봤던 다른 친구들도 기억이 나지 않던 장면이었습니다. | |
| 그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감독이 이른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라면서
그 장면을 놓친 우리들에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독스,
그리고 영화 내용과 관련지어서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 등을 이야기해주더군요.
양자물리학 등에 무지한 저로서는 그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다소 힘들기는 했지만
영화를 만든 호소다 마모루(細田守)라는 감독이 그런 장면을 굳이 삽입했다는 것은
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관객들에게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들었습니다. |
●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궁금하다면, 열기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와 함께 시안산(청산가리) 병, 방사성물질의 원자 하나를 넣어 둔다. 그 원자가 한 시간 안에 붕괴되면 병이 깨져 고양이가 시안산에 중독돼 죽는다. 원자가 그대로 있으면 고양이는 살아남는다. 우리는 상자 속을 알 수 없으므로 확률적으로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 죽은 상태로 여겨진다. 이것이 양자역학 권위자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에어빈 슈뢰딩거가 제기한 고양이 패러독스다.
‘살아 있기도 하고 죽기도 한 고양이’는 미시세계에서 양자가 중첩(重疊)된 상태다. 슈뢰딩거는 그런 고양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하기 위해 이런 사고(思考)실험을 제안했다. 기존의 양자역학에서는 입자(粒子)는 파동성(波動性)이 있으므로 한 시점에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고양이는 반드시 살아 있거나 죽은 상태, 둘 중 하나이므로 입자는 여러 곳에 퍼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복잡한 논란이 벌어진 것은 전자의 이상한 특성 때문이다. 요즘엔 중학생만 돼도 아는 사실이지만 전자는 입자와 파동의 두 가지 성질을 띤다. 전자는 평소엔 파동 형태로 존재하지만 관찰자가 눈으로 관찰할 때는 입자로 바뀐다. 그래서 양자이론에선 세상은 관찰자의 개입에 따라 확률적으로 존재하며 여러 차원의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다른 내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SF영화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 동아일보 2007년 8월 17일자 정성희 논설위원의 칼럼 『횡설수설/슈뢰딩거의 고양이』 중에서.
● 칼럼 전문 바로가기 |
ⅲ : 카케루(かける)
여담입니다만, 말이 나온 김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야기를 조금 더 하죠.
공학도인 그 친구가 그 영화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놓치지 않았던 한편,
저는 영화 제목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의 표기 방법이 흥미로웠는데
한자를 쓰지않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한 '카케루(かける)'가 제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달리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제목에서의 '카케루(かける)'는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 읽어본 번역판 소설을 보니 원작소설의 제목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당히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라서 그 의미에 따라 여러가지 한자로 표기되는데요.
「掛ける」,「懸ける」,「賭ける」,「駆ける」,「駈ける」,「翔る」,「欠ける」.
이렇게 여러가지 '카케루(かける)'가 있고 또 의미하는 바는 다 외우기 힘들 만큼 많습니다. | |
● '카케루(かける)'의 여러가지 뜻, 열기
「掛ける」 또는 「懸ける」로 표기되는 '카케루(かける)'는
1 (높은 곳에) 걸다 늘어뜨리다 치다, 2 (말을) 붙이다 건네다, 3 얹다 올려놓다, 4 가설하다 세우다 치다 놓다, 5 (의자 따위에) 걸터앉다, 6 (단추 자물쇠 등을) 채우다 잠그다, 7 개의하다 마음을 쓰다, 8 끼얹다 뿌리다 치다, 9 덮다 (몸에) 걸치다, 10 씌우다 입히다, 11 감다 두르다 묶다, 12 잡다 사로잡다 속이다, 13 (희망 등을) 걸다 빌다, 14 (폐나 영향을) 끼치다, 15 (돈·시간·수고 등을) 들이다, 16 (보험에) 들다 가입하다, 17 곱셈하다 곱하다, 18 (높게 달아) 올리다, 19 (마음이나 정 등을) 주다, 20 작용시키다 동작을 취하다, 21 (도구나 기계 등을 움직여) 작동시키다, 22 에누리하다, 23 부과하다, 24 (상금 등을) 걸다, 등 굉장히 많은 뜻을 가지고 있고
「賭ける」로 표기되는 '카케루(かける)'는 (실패하면 잃을 각오로) 걸다 내걸다 내기하다 지르다,
「駆ける」 또는 「駈ける」로 표기되는 '카케루(かける)'는 (말 타고) 달리다 뛰어가다,
「翔る」로 표기되는 '카케루(かける)'는 (하늘 높이) 날다 비상하다, 등의 의미가 있으며
한편 '카케루(かける)'를 「欠ける」라고 표기하면
1 (일부분이) 깨져 떨어지다 귀떨어지다, 2 부족하다 모자라다 없다, 3 (있어야 할 것이) 빠지다 결여되다, 등의 뜻이라고 합니다. |
| 소설가 츠츠이 야스타카는 소설을 쓸 때 이 '카케루(かける)'를 어떤 '카케루'로 생각했을까.
이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호소다 마모루는 '카케루(かける)'의 뜻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우리말 번역을 생각하면 '달리다'라는 뜻의 '카케루(駆ける)'가 적당할 것 같지만
이 영화의 영어 제목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에서의 'leap(뛰어넘다)'라든지
영화 속 대사 중 '뛰어넘다/건너뛰다'라는 뜻으로 몇차례 사용된 '토비코에루(飛び越える)'에 주목하자면
'날다, 비상하다'는 뜻의 '카케루(翔る)'가 소설가나 감독의 의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표현인 듯 싶네요.
하지만 작품의 '한줄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제목에서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한 것을 보면
'카케루(かける)'의 다른 뜻으로도 인식하기를 바란 것은 혹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이를테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 또는 '시간을 뛰어넘는 소녀'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일으킬 지 알 수는 없어도
잘될 거라는 작은 기대을 가지고 '시간을 지르는(賭ける) 소녀'일 수도 있다는 거죠.
또는 시간을 사로잡거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시간을 작동시킨다는 뜻의 '카케루(掛ける)'일 수도 있구요.
여담이라고 해놓고는, 저 혼자 머리를 갸웃거린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군요. 각설하고.
ⅳ : 밤을 내달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이어지더니
또 거기에서 '카케루(かける)'에 대한 잡념이 시작되고
그 바람에 흥얼거리게 되는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하나.
2002년 9월 11일 발매 앨범 三日月ロック(Mikazuki Rock, 초승달 록).
그 첫번째 트랙 '요루오 카케루'.
夜を駆ける(Yoru wo Kakeru, 밤을 내달린다).
그래서, 덕분에, 오랜만에 찾아서 들어봅니다. | |
듣는 이에 따라 노랫말이 담고있는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듯한 이 노래.
오 분 남짓의 대중음악일지라도 '각자의 관심에 따라 귀담아 들리는 것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 어떤가요? 어떻게 들리나요?
● 夜を駆ける(Yoru wo Kakeru, 밤을 내달린다) 노랫말, 열기
夜を駆ける ∼ スピッツ
研がない強がり 嘘で塗りかためた部屋
抜け出して見上げた夜空
よじれた金網を いつものように飛び越えて
硬い鋪道を駆けていく
似てない僕らは 細い糸で繋がっている
よくある赤いやつじゃなく
落ち合った場所は 大きな木も騒めき やんで
二人の呼吸の音だけが浸みていく
君と遊ぶ 誰もいない市街地
目と目が合うたび笑う
夜を駆けていく 今は撃たないで
遠くの灯りの方へ 駆けていく
壁の落書き いつしか止まった時計が
永遠の自由を与える
転がった背中 冷たいコンクリートの感じ
甘くて苦いベロの先 もう一度
でたらめに描いた バラ色の想像図
西に稲妻 光る
夜を駆けていく 今は撃たないで
滅びの定め破って 駆けていく
君と遊ぶ 誰もいない市街地
目と目が合うたび笑う
夜を駆けていく 今は撃たないで
遠くの灯りの方へ 駆けていく | 밤을 내달린다 ∼ 스핏츠
날이 무딘 강한 체 하기 거짓말로 발라 다진 이 방
몰래 빠져나가 올려다본 하늘
비틀어진 철망을 여느 때처럼 뛰어넘어
딱딱한 포장길을 내달려가네
닮지 않은 우리는 가는 실로 이어져 있네
흔히 있는 빨간 녀석이 아니라
합류했던 장소는 커다란 나무도 웅성거리다 그치고
둘의 호흡 소리만이 스며들어 가네
너와 노니네 아무도 없는 시가지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웃네
밤을 내달려가네 지금은 쏘지 말아줘
먼 곳의 등불 쪽으로 내달려가네
벽의 낙서 어느샌가 멈춘 시계가
영원한 자유를 부여하네
굴렀던 등짝 차가운 콘크리트의 느낌
달콤하고 쓴 혀끝 한 번 더
아무렇게나 그린 장밋빛 상상화
서쪽으로 번개 빛나네
밤을 내달려가네 지금은 쏘지 말아줘
멸망의 운명 깨뜨리고 내달려가네
너와 노니네 아무도 없는 시가지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웃네
밤을 내달려가네 지금은 쏘지 말아줘
먼 곳의 등불 쪽으로 내달려가네 |
2002-09-11
三日月ロック
● 夜を駆ける 노랫말
(후리가나 표기) 살펴보기 |
+
셋 다 서로 관련이 없는 영화, 노래들인데 어쩌다 제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글이 두서없이 길어진데다가 '열기/닫기'의 인용문까지 여럿 되는 통에, 읽기가 다소 불편했겠네요. 죄송.
√ 夜を駆ける 노랫말(우리말 번역)의 출처는 (c) spitzHAUS 입니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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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03 00:36 | 스핏츠/ALBUM | trackback (0) | reply (26) |
Tags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에 나타난 유곽의 메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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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と千尋の神隠し』における郭のメタファ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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